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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아트 시대 다시 보는 20세기 현대미술가 (개념미술, 미디어, 실험정신)

by syun2 2025. 12. 11.

생성형 AI와 NFT가 등장하면서 ‘이미지 만드는 기술’보다 ‘무엇을, 왜 만드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20세기 현대미술가들, 특히 개념미술과 미디어 실험,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거장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AI 아트 시대에 꼭 다시 봐야 할 20세기 현대미술가들을 개념미술, 미디어, 실험정신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하며, 오늘의 디지털 창작과 어떻게 연결해 볼 수 있을지 살펴봅니다.

20세기 현대미술가
20세기 현대미술가

개념미술, AI 아트의 사고방식을 먼저 열어준 선배들

AI 아트의 핵심은 ‘이미지를 누가 그렸느냐’보다 ‘어떤 아이디어를 어떻게 설계했느냐’에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됩니다. 프롬프트 한 줄, 데이터셋의 구성, 알고리즘의 선택이 결과물을 크게 바꾸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AI 아트는 사실 1960~70년대 개념미술가들이 던졌던 질문을 디지털 환경에서 다시 이어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작품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인가, 아니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개념과 규칙, 지시문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개념미술의 대표적인 작가 솔 르윗(Sol LeWitt)은 벽에 직접 그림을 그리기보다,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간단하지만 구체적인 지시문을 작품으로 제시했습니다. 예를 들어 “벽의 모서리에서 모서리로 직선을 그어라”, “정사각형 안에 대각선을 반복하라” 같은 규칙입니다. 실제 선을 긋는 사람은 작가가 아닐 수도 있고, 심지어 전시장마다 다른 사람이 그리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물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를 만들어 낸 ‘아이디어와 알고리즘’입니다. 오늘날 AI 이미지 생성에서 프롬프트를 설계하고, 모델을 선택하고, 결과를 큐레이션하는 과정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 같은 작가는 “‘의자’라는 개념은 의자 사진, 실제 의자, 사전 정의 중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이미지와 언어, 사물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데이터셋 속 이미지와 실제 세계의 관계’, ‘텍스트 프롬프트와 결과 이미지의 거리’를 생각하게 만드는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생성형 AI가 제시하는 이미지는 실제 현실을 복제하는가, 아니면 언어와 데이터가 만든 가상의 개념을 시각화하는가? 개념미술은 이 질문에 접근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 이론적 도구를 제공합니다. AI 아트 시대에 개념미술가들을 다시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비슷한 것을 예전에 이미 했다”는 역사적인 사실 때문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기술이나 도구보다 ‘질문과 개념’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규칙을 설정하고, 어디까지를 작품으로 인정할 것인가, 작가의 역할을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 같은 논의는 지금도 그대로 유효합니다. AI 이미지와 NFT 작품이 넘쳐나는 지금, 진짜 차별화를 만드는 것은 결국 프롬프트 문장이나 툴의 종류가 아니라, 그 뒤에 서 있는 개념과 문제의식이라는 점을, 개념미술은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래서 많은 디지털 창작자와 컬렉터들이 자연스럽게 솔 르윗, 코수스, 오노 요코, 플럭서스 아티스트들의 작업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들은 ‘결과물의 미학’을 넘어, 참여 방식, 지시문, 규칙, 언어 구조를 작품의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왔고, 이는 오늘날 AI 아트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활용하는 데 강력한 참고점이 되어 줍니다.

미디어 실험, 아날로그에서 디지털까지 이어지는 흐름

오늘날 AI 아트와 NFT는 대부분 디지털 화면과 네트워크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미디어를 예술로 끌어들인다’는 발상 자체는 20세기 중후반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먼저 시도한 것에 가깝습니다. 비디오, TV, 컴퓨터, 복사기, 사진 합성, 인터랙티브 장치 등, 그 당시에는 낯설고 기술적인 매체였던 것들이 예술가들의 손에 들어와 작품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매체 자체가 메시지”라는 감각이 자리 잡았습니다. 백남준은 TV와 비디오를 예술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이며, 전자 이미지가 단순한 정보 전달 도구가 아닌 새로운 조각이자 퍼포먼스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작업은 단순히 기술적으로 앞섰다는 것보다, 당대의 미디어 환경을 어떻게 ‘놀이와 비판, 실험의 장’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지금 NFT 아티스트들이 블록체인과 스마트 컨트랙트, 마켓플레이스를 작품의 일부로 삼듯이, 백남준은 방송국과 TV 세트, 케이블과 전자 신호를 작품의 재료로 삼았습니다. 이런 태도는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그 기술을 둘러싼 시스템 전체를 창작의 재료로 보라”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1960~70년대의 비디오 아트와 초기 컴퓨터 아트 역시 오늘날 생성형 AI와 닮은 지점이 많습니다. 일부 작가는 프로그래머와 협업해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이미지를 생성하게 하고, 자신의 역할을 ‘규칙 설계자’와 ‘결과 큐레이터’로 재정의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모델 파라미터와 시드 값을 조절하며 원하는 이미지를 얻어내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 관람객들은 “이건 사람이 한 건가, 기계가 한 건가?”를 의심했고, 지금의 관람객들도 비슷한 질문을 던집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이 작품의 일부가 되도록 설계하는 예술가의 태도입니다. AI 아트와 NFT를 둘러싼 또 하나의 큰 축은 ‘복제와 진품성’입니다. 20세기 중반 앤디 워홀과 팝아트, 사진과 실크스크린, 인쇄 매체의 발달은 ‘원본’ 개념을 이미 흔들어 놓았습니다. 워홀은 의도적으로 똑같은 이미지를 반복 인쇄하면서 미세한 차이와 인쇄 과정의 오류까지 작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오늘날 블록체인이 제공하는 ‘토큰으로 구분된 원본성’ 역시, 이런 논의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차이는 기술의 종류일 뿐, 그 기술이 던지는 질문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AI 아트 시대에 20세기 미디어 실험을 다시 돌아보면, 결국 기술이 아무리 바뀌어도 중요한 건 “그 기술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디까지 작품으로 끌어들이느냐”라는 판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새로운 툴을 쓴다는 사실만으로는 작품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백남준이나 초기 컴퓨터 아티스트들처럼, 그 도구와 네트워크, 시스템이 우리의 시각과 사고를 어떻게 바꾸는지까지 함께 포착하는 태도가 있을 때, 비로소 ‘미디어 아트’가 진짜 힘을 갖게 됩니다. AI·NFT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실험정신, 기술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핵심 태도

생성형 AI 툴이 대중화되면서, “이제 예술은 끝났다”는 말과 “이제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동시에 떠돕니다. 하지만 20세기 현대미술의 역사를 떠올려 보면, 새로운 기술과 도구가 등장할 때마다 비슷한 우려와 기대가 반복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과 영화, 인쇄 기술, TV와 컴퓨터, 인터넷까지, 그때마다 예술가들은 “이제 회화는 죽었다”, “이제 손으로 그릴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습니다. 기술이 예술을 끝내기보다, 오히려 새로운 실험의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항상 ‘실험정신’이었습니다. 20세기 거장들을 떠올려 보면,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한 가지 스타일을 평생 반복하기보다,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다는 점입니다. 피카소는 사실적 데생, 청색과 장미 시기, 아프리카 조각의 영향, 입체파, 신고전주의적 회귀, 후기의 거친 드로잉까지, 수십 번 스타일을 바꾸며 스스로를 해체했습니다. 잭슨 폴록 역시 전통적인 구상에서 출발해, 바닥에 캔버스를 펼치고 물감을 떨어뜨리는 액션 페인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비판과 조롱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기준으로 보면 모두 ‘너무 나간’ 실험가들이었습니다. 오늘날 AI 아트와 NFT, 디지털 설치 작업을 하는 창작자들에게 이들의 태도는 중요한 힌트를 줍니다. 새로운 도구를 처음 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쁘고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빨리 뽑아내는 데 집중합니다. 하지만 거장들의 작업 노트를 들여다보면, 진짜 도약은 언제나 ‘망해도 되는 실험’에서 나왔습니다. 잘 되지 않아도, 팔리지 않아도, 심지어 이해받지 못해도, 한동안은 실험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 결국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출발점이었습니다. AI 도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튜토리얼에서 알려주는 ‘정답 프롬프트’만 따라 하기보다, 실패를 감수하며 나만의 규칙과 조합을 만들어 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실험정신은 창작자뿐 아니라 관람자와 컬렉터에게도 중요합니다. NFT와 AI 이미지에 회의적인 사람이라도, “이 모든 것이 다 사기”라고 일괄적으로 치부해 버리면, 20세기 초 사진과 인상주의, 추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나중에 중요한 변화를 놓치게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기술에만 흥분해 ‘무조건 새로우니 좋은 것’이라고만 보는 것도 위험합니다. 실험정신이란, 변화에 열려 있으면서도 동시에 질문을 멈추지 않는 태도입니다. “이 기술이 진짜 바꾸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이 작업이 10년 뒤에도 의미 있을까?”라는 질문을 함께 던질 때, 실험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역사 속 좌표를 갖게 됩니다. 20세기 현대미술가들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결국 그들이 ‘기술을 쓴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만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은 시대와 도구를 바꿔 가며 지금도 계속 이어집니다. AI 아트 시대의 우리 역시, 새로운 툴을 만난 또 하나의 세대로서, 어떤 질문을 던질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서, 20세기 실험정신의 역사와 마주 앉아 보는 일은 여전히 유효한 참고서가 됩니다.

AI 아트와 NFT는 확실히 예술의 생산 방식과 유통 구조를 바꾸고 있지만, 그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20세기 현대미술가들의 개념미술, 미디어 실험, 실험정신을 함께 돌아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솔 르윗과 코수스, 백남준과 초기 미디어 아티스트, 그리고 끝없이 변신했던 거장들이 보여 준 것은 결국 “도구보다 질문이 먼저”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앞으로 AI를 쓰든, 쓰지 않든,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개념과 태도로 이미지를 만들고, 보고, 소유할 것인가입니다. NFT 이후 더 주목받는 20세기 현대미술가들을 공부하는 일은, 결국 AI 시대를 더 깊이 이해하고,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기 위한 가장 탄탄한 공부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