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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해체한 20세기 예술가들 (콜라주, 레디메이드, 퍼포먼스)

by syun2 2025. 12. 23.

20세기 현대미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림=캔버스+물감”이라는 전통적 공식을 가차 없이 부쉈다는 점입니다. 예술가들은 신문과 포장지를 찢어 붙이는 콜라주,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그대로 가져오는 레디메이드, 몸과 시간을 활용한 퍼포먼스 등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통해 예술의 재료와 형식, 심지어 작품의 정의 자체를 다시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콜라주, 레디메이드,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전통을 해체한 20세기 예술가들의 실험을 살펴보고, 그 영향이 오늘날 디자인·광고·퍼포먼스·콘텐츠 문화 속에까지 어떻게 이어지는지 정리해 봅니다. 미술관에서 “이게 왜 작품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경험이 있다면,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현대미술이 훨씬 덜 낯설게 느껴질 것입니다.

전통을 해체한 20세기 예술가들
전통을 해체한 20세기 예술가들

콜라주: 찢고 붙이며 탄생한 새로운 이미지 혁명

콜라주(collage)는 프랑스어로 “붙이다”라는 뜻에서 온 말로, 20세기 초 피카소와 브라크가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 현대미술의 중요한 기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전까지 회화는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직접 그리는 것’만을 의미했지만, 이들은 신문 조각, 벽지, 과자 포장지, 나무무늬 인쇄 종이, 음악 악보 등을 잘라 캔버스에 붙이고, 그 위에 다시 선과 색을 더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예를 들어 기타를 그릴 때 실제 나무무늬 종이를 붙여 악기의 질감을 표현하거나, 신문 활자를 붙여 일상의 정보와 예술 이미지를 한 화면 안에 겹치게 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콜라주는 “그림은 반드시 손으로 그려야 한다”는 전통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조합하는 것도 창작”이라는 매우 현대적인 생각을 시각화했습니다. 콜라주의 혁명성은 단순히 재료가 달라졌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콜라주는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씩 보는 이미지 조각들을 다시 엮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방식입니다. 신문 기사, 광고, 사진, 타이포그래피, 패턴 등을 잘라 붙일 때, 서로 관계없어 보이던 정보들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 갑자기 대화를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전쟁 기사 옆에 화려한 화장품 광고가 붙어 있으면,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모순된 정보들로 뒤섞여 있는지 자연스럽게 드러나죠. 콜라주는 이렇게 현실의 단편들을 재조합하며 “우리가 어떤 이미지 환경 속에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이 기법은 곧 다다이스트와 초현실주의자, 후대의 그래픽디자이너들에게 널리 이어졌습니다. 포토몽타주, 잡지 커버, 포스터, 앨범 재킷, 광고 캠페인 등에서 서로 다른 사진과 텍스트, 도형을 한 화면에 겹쳐 배치하는 감각은 모두 콜라주의 후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포토샵, 앱, 스마트폰으로 이미지를 오려붙이고, 여러 레이어를 겹쳐 편집하는 방식 또한 콜라주적 사고방식의 연장선입니다. 즉, 콜라주는 ‘물리적으로 종이를 붙이는 기법’을 넘어, “현실의 파편을 모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태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전시에 가서 콜라주 작품을 만났을 때, “이건 나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이미지를 선택할 것인가, 어떤 것과 어떤 것을 나란히 두고 충돌시키거나 연결할 것인가?” 콜라주의 핵심은 붙이는 손기술보다 ‘선택과 배치에서 나오는 의미’에 있습니다. 이 관점을 기억하면, 일상에서 보는 광고나 이미지 편집물도 훨씬 흥미로운 하나의 콜라주 작품처럼 읽히기 시작할 것입니다.

레디메이드: 선택만으로 작품이 된 일상 오브제

레디메이드(ready-made)는 이미 공장에서 생산된 완성품을 거의 손대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전시 공간에 가져와 “이것이 작품이다”라고 선언하는 방식입니다. 이 과감한 발상을 미술사에 본격적으로 던져 넣은 인물은 바로 마르셀 뒤샹입니다. 그는 건축 자재 상점에서 파는 보통의 소변기를 눕혀 놓고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에 출품했고, 자전거 바퀴와 의자를 결합한 오브제, 병걸이, 눈금자 등 일상 물건에 최소한의 개입만 더해 작품으로 제시했습니다. 당시 많은 이들은 이를 “미술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난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레디메이드는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질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레디메이드가 던진 핵심 메시지는 “예술은 물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과 맥락, 그리고 제도”라는 점입니다. 소변기는 원래 화장실에 있을 때는 누구도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작가가 그것을 선택해 이름을 붙이고 전시장에 놓는 순간, 우리는 그 물건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됩니다. 기능적·위생적 도구였던 소변기는 갑자기 조형적 형태, 사회적 의미, 상징성을 가진 오브제로 바뀌죠. 뒤샹은 바로 이 전환, 즉 “쓸모 있는 물건이 쓸모를 잠시 잃고 순수한 사물로 보이는 순간”을 작품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예술가는 손으로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예술로 볼지 지정하는 사람”이라는 도발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습니다. 레디메이드는 이후 개념미술, 설치미술, 팝아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앤디 워홀이 수프 깡통과 콜라병을 작품으로 가져온 것, 요셉 보이스가 지방과 펠트, 꿀, 토끼 시체 등 일상적이거나 낯선 물질을 그대로 작업에 사용한 것, 오늘날 갤러리와 비엔날레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설치 작업들은 모두 “이미 존재하는 물건을 다른 맥락에 옮겨 놓는 행위”를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우리가 상점, 거리, 공장에서 보던 것이 전시장에 올려지는 순간, 그 물건은 기능을 넘어 사회 구조, 소비, 노동, 권력, 환경 등 다양한 이슈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변합니다. 일상에서도 레디메이드의 감각은 익숙합니다. 카페 인테리어로 쓰인 공장용 램프, 오래된 금속 선반, 산업용 의자 등은 원래 기능적 장비였지만, 이제는 “멋진 오브제”로 소비됩니다. 사진작가가 평범한 쓰레기 더미나 비닐봉지를 찍어 예술 작품으로 발표하는 행위도, 넓은 의미에서 레디메이드적 사고방식입니다. 전시에서 레디메이드 작품을 볼 때 가장 중요한 감상 포인트는 “이 물건이 원래 어디에 있었고, 어떤 기능을 했는지,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일상 오브제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로 변신하는 과정을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퍼포먼스: 몸과 시간으로 그린 살아 있는 예술

퍼포먼스(Performance Art)는 완성된 물건이 아니라, 작가의 몸과 행동, 시간의 흐름 자체를 작품으로 삼는 예술입니다.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퍼포먼스는, 무대 예술로서의 연극·무용과는 다르면서도, 그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입니다. 퍼포먼스 작가는 때로는 관객 앞에서 자신의 몸을 반복적으로 움직이거나, 일상적인 행동을 극단적인 조건 속에서 지속하거나, 관람객에게 참여를 요청하며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감정, 긴장, 관계, 기록입니다. 퍼포먼스의 등장은 “예술 작품은 오래 남아야 한다”는 전통적 믿음을 뒤흔듭니다. 그림이나 조각은 물질로 남아 복제·판매·소장될 수 있지만, 퍼포먼스는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만 일어나고 사라지는 일회적인 사건에 가깝습니다. 물론 사진과 영상, 문서로 기록은 남지만, 이는 작품 그 자체라기보다 흔적에 가깝습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퍼포먼스는 예술을 시장과 소유의 논리에서 잠시 빗겨나게 만들고, “예술이 반드시 물건일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동시에 관객은 작품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직접 목격하고 참여한 경험을 기억 속에 간직하게 되죠. 퍼포먼스는 사회·정치·젠더·환경 문제를 다루는 데도 자주 쓰입니다. 어떤 작가는 자신의 몸을 극한으로 몰아붙여 폭력과 통제의 구조를 드러내고, 또 다른 작가는 관객에게 선택을 맡김으로써 책임과 도덕의 문제를 묻습니다. 거리 행진, 플래시몹, 시위와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행동도 퍼포먼스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디지털 기술과 결합해 라이브 스트리밍, 온라인 퍼포먼스, VR·AR 기반의 체험형 작업 등 다양한 형태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런 작품들에서는 화면 속 이미지뿐 아니라,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 행동을 함께 보고·하고 있다”는 시간적 동시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퍼포먼스를 감상할 때는 “이게 예술인가, 퍼포먼스 쇼인가”를 따지기보다,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 좋습니다. “왜 작가는 이 행동을 굳이 사람들 앞에서 반복하고 있을까?”, “이 상황에서 나는 관객으로서 무엇을 느끼고,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이 행동이 끝난 뒤에 무엇이 남는가?” 퍼포먼스는 종종 불편함과 당혹감을 동반하지만, 바로 그 감정이 작품이 겨냥한 지점일 수 있습니다. 전통적 회화와 조각이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예술이었다면, 퍼포먼스는 몸과 시간을 통해 직접 부딪히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콜라주, 레디메이드, 퍼포먼스는 20세기 예술가들이 전통을 해체하며 만들어 낸 세 가지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종이를 찢고 붙이며 현실의 파편을 재조합한 콜라주, 일상 물건을 선택해 전시장으로 옮겨 예술의 정의를 되묻게 한 레디메이드, 몸과 시간의 흐름 자체를 작품으로 만든 퍼포먼스 덕분에, 현대미술은 더 이상 “그림과 조각”에만 머물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전시를 보거나 이미지를 접할 때, 이 세 키워드를 떠올리며 “이 작업은 무엇을 붙이고, 무엇을 가져오고, 무엇을 수행하고 있는가”를 한 번씩 체크해 보세요. 그러면 난해하게 느껴졌던 현대미술의 많은 작품이,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감각을 제안하는 흥미로운 시도로 다가오기 시작할 것입니다.